총 게시물 11건, 최근 0 건
 

'천천히 써야 써지는 볼펜처럼'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7-04-05 (수) 19:18 조회 : 95

LA 다운타운에 있는 성도의 사업체 심방을 나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위해 식당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빌딩 사이로 높다란 하늘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삐 달리는 자동차 사이로 분주한 발걸음들은 앞서 보내고 천천히 걸어서 식당까지 갔습니다. 느긋한 걸음 사이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나누는 인생과 신앙의 이야기가 가슴 속 깊이 내려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빨리 걸었으면 내려오다가 중간에 멈췄을 이야기들입니다. 느린 걸음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차로 달리면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짧은 점심시간을 맞추기 위해 분주히 걷는 사람들의 표정, 거래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나온 직장인의 조금은 과장된 웃음, 그 웃음을 얹어 마음마저 얻으려는 괜한 몸짓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식사하는 내내 그 느림은 계속되었습니다. 자리에 앉히고서는 한참 만에 음료수 주문을 받더니 다시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음식 주문을 받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웨이터가 밉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짜증이 앞섰을 텐데 어차피 마음을 비우고 느린 걸음으로 찾아온 식당에서 바쁜 티를 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옆에서 큰소리로 빨리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느림을 방해할 뿐이었습니다. 천천히 오가는 대화 속에 하나님을 향한 소중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바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굉장한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닌데 일상의 삶이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주위의 분주함 속에서 누리는 느림은 시간의 흐름을 붙잡은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오늘 함께 식사한 성도님의 느림에 맞추다 보니 저도 같이 느려졌나 봅니다. 그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목사님 고향이 충청도세요?" "아닌데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대답을 듣고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서울이 고향인데 사람들이 자꾸 충청도가 고향 아니냐고 물어요." 함께 간 아내는 속으로 웃음이 나서 혼났다고 했습니다. 가뜩이나 성격이 급한 아내는 느릿느릿 걷는 걸음에 천천히 말씀하시는 그분 때문에 꽤 답답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느린 걸음걸이와 느긋한 말투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 하나 꺼낼라치면 그 배경에서부터 자초지종을 다 설명해야 나옵니다. 본론이 나오기까지 서론이 하도 길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칫 대화의 중심을 놓치기에 십상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느긋함을 보여준 분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라고 하면 말도 빠르고 날카롭게 하면서 상대방의 빈틈을 공략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선입관을 깨트리는 만남이었습니다. 새벽 기도회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습니다. 늘 쓰던 볼펜인데 아무리 써도 나오지 않습니다. '속에는 아직 까만색 잉크가 가득한데 왜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이리저리 빠르게 끌쩍거려도 써지지 않던 볼펜이 어느 순간 속도를 줄여 천천히 쓰니 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구나! 천천히 써야 써지는 볼펜처럼 우리 인생도 천천히 가야 갈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속히 하고 말은 천천히 하며 함부로 성내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1:19, 현대인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