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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도 반상회가 있다.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8-11-13 (화) 08:55 조회 : 778

골목 맞은편 끝 집이 한참을 수리하더니 새 주인을 맞았다. 새로 이사 온 백인 부부는 길을 오가며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하며 살갑게 다가섰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얼굴을 익히더니 이 부부가 동네 사람들에게 반상회를 하자며 몇 날 몇 시에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초대장을 보냈다. 첫 반상회에는 선약이 있어 참석 못 하는 대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는 아들을 보냈다. 반상회 어땠냐는 물음에 아들은 좋았단다. '미국에서 반상회는 무슨 반상회, 그러다 말겠지. 아들이 대신 얼굴 한 번 비쳤으니 됐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잊고 있었는데 두 번째 반상회를 한단다.

반상회 안내문은 진작에 받아 두었지만 가기 싫었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반상회까지 가는 게 부담되었다. 반상회에 가면 뻘쭘하게 앉아 있다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라도 웃음을 띤 채 자리를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또 영어로 동네 사람들과 의미 없는 수다를 떨어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아내에게 혼자 다녀오라고 하니 가장인 내가 같이 가야지 혼자서는 못 간다고 야단이다. 딸에게 물었다. "아빠 반상회에 안 가도 되겠지?" 당연히 가지 말고 집에 같이 있자고 할 줄 알았는데, 딸은 오히려 동네 주민으로서 그런 자리에는 꼭 가야 한단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반상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 스무 걸음쯤 떼었을까. 아내가 슬쩍 말을 흘린다. "우리 가지 말까?" 아내도 가기 싫었던 게다. 잘됐다 싶어 아내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는데 이번에도 딸이 문제다. 왜 돌아왔냐며 성화를 부리는 통에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등 떠밀려 반상회에 참석했다.

이번 반상회의 주제는 "재난 대비"란다. 시에서 재난대비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두 명이 나와서 재난 대처 요령에 대해서 자세히, 그것도 너무도 자세하게 한 시간 이상 설명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나중에는 설명한 것을 잘 이해했는지 시험도 봤다. 시험 후에는 간단한 다과와 함께 교제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사 온 지 3년이 지났지만, 한두 집 빼고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는데, 이번 반상회를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앞집에 사는 부부는 내가 살았던 하와이에서 왔다고 해서 반가웠고. 그 옆에 사는 일본인 노부부는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반가웠다. 그날 모인 집에는 우리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딸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30년을 한 곳에 살고 있다는 한국 분과도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반상회를 소집했던 백인 부부의 정성 어린 배웅을 받으며 반상회를 마쳤다. 반상회에 갈 때는 무거운 발걸음에 어둡던 골목길이 나올 때 보니 밝아졌다. 어둠은 더욱더 깊어졌지만, 마음을 비치는 이웃이라는 해가 여럿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에 누가 사는지 둘러볼 여유도 없이 살았다. 반상회는 아니더라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정도는 알고 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세상은 해가 떠야 환해지겠지만 사람 마음이야 옆 사람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으로도 얼마든지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집 앞 골목길에 들어서면서 두리번거린다. 반상회에서 만난 이웃을 보면 내가 먼저 손이라도 흔들어야지.

 <LA중앙일보 칼럼, 2018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