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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거리며 새해를 맞다.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9-01-15 (화) 14:13 조회 : 270

볼일이 있어 나가다가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 시간에 뭘 할까?' 하는데, 아내가 물건 바꿀 것이 있단다. 아내를 따라서 간 창고형 대형매장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아직 문도 열기 전인데 달리기 출발선에 선 사람들처럼 카트를 앞세우고 기다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물건을 반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아내가 오기를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아침 햇살이 좋아 밖으로 나왔다.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먹을거리를 찾아 부리를 조아리는 새들과 눈을 마주치며, 하늘 높이 솟은 구름을 보면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몇 년 전 '채식주의자'라는 소설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은'소설 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소설 쓰는 일은 서성거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뜨겁거나 서늘한 질문들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돌아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되짚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품은 채 저에게 주어진 삶 위에서 끈질기게 서성일 것입니다."

한강이 소설 쓰기를 서성거림에 비유했다면, 인생도 서성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기쁘거나 슬픈 질문들을 품에 안은 채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돌아서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되짚어 보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품은 채 주어진 삶 위에서 끈질기게 서성거려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어수선 산란함도 지나고, 또 다른 한 해를 여는 올찬 희망도 여상함으로 바뀐다. 분주한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에게도, 하릴없이 길에서 어정버정하는 이들에게도 새해는 어김없이 다가왔다. 새해를 맞는 각오가 있을 만도 한데, 남다른 다짐으로 결사적으로 생활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마음은 있는데, 여전히 우리는 일상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서성거리는 것에 익숙해서일까? 웬만한 서성거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써 괜찮은 척,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여전히 우리는 시간의 가장자리만 맴돌 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새해 달력을 건 게 언제라고 몇 날을 이렇게 속절없이 보냈겠는가?

미국에 올 때는 남다른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독하게 마음먹고 온 사람이 한 둘이겠는가? 그런데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처음 먹은 목표는 사라진 지 오래다. 목표를 상실한 채 걸어가는 모습은 서성거림을 닮았다. 한참을 돌고 또 헤매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주위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렇게 서성거리다 보니 이민 경력이 쌓였다. 서성거리다 보니 아이들도 키웠다. 서성거리다 보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그렇게 서성거리다 보면 일생이 금세 갈 것이다. 어차피 서성거리며 걸어온 길인데 조금 더 돌아가면 어떻겠는가?

본격적으로 서성거리며 살아보자. 마음만 있었지 배우지 못했던 것에도 기웃거려보고, 어릴 적 가졌던 꿈 앞에서도 어슬렁대보자. 그렇게 서성거리며 걸어온 인생길이나, 목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이나 결국은 끝에서 만날 것이다. 조금은 낯선 그 서성거림이 이민 생활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여유로 바뀌게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서성거리며 새해를 맞는다

<LA 중앙일보 칼럼, 2019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