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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인 정오 기도회 (160)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20-10-17 (토) 18:50 조회 : 15
“나이 들수록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유”
<전교인 정오 기도회-160>  
2020. 10. 15.(목)

* 찬송가 254장(통 186장) “내 주의 보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두 가지가 사람에게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남자 얼굴에 나는 수염입니다. 철면피 같이 두꺼운 얼굴을 뚫고 나오니 그 강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여자의 얼굴이랍니다. 그 강한 수염도 뚫지 못할 정도라는 게 그 이유입니다. 

세상살이 사고와 사건이 없었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의 것을 탐하고, 뺏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거짓과 음해로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험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황당함보다 그 일을 벌여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의 뻔뻔함 때문일 것입니다. 

예로부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불렀습니다.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또, 염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움을 가리켜 파렴치(破廉恥)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를 뿐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마저 깨트리는 악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인 관중(管仲)이 지은 “관자(管子)”의 ‘목민편(牧民篇)’을 보면 사유(四維)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維)란 그물의 위쪽 코를 꿰놓은 줄로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벼리를 가리키는데 어떤 일이나 글의 뼈대란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관중에 의하면 나라에는 네 벼리, 즉 ‘사유(四維)’가 있는데, 한 벼리가 끊어지면 기울고, 두 벼리가 끊어지면 위태하고, 세 벼리가 끊어지면 전복(顚覆)되고, 네 벼리가 끊어지면 멸절(滅絶)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사유는 “예(禮), 의(義), 염(廉), 치(恥)”입니다. ‘예’란 ‘절도를 넘지 않는 것(不踰節)’이고, ‘의’는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 것(不自進)’, ‘염’은 ‘악을 감추지 않는 것(不蔽惡)’, ‘치’는 ‘굽은 것을 좇지 않는 것(不從枉)’이라고 했습니다.

‘예의염치’가 나라를 떠받치는 네 가지 뼈대라면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은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사람 사이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도덕적 기준입니다. 중국에서는 나라를 떠받치는 네 가지 뼈대에 사람이 지켜야 할 네 가지 도리를 합쳐 팔덕(八德)이라고 했습니다. 팔덕을 망각한 사람을 ‘망팔(忘八)’이라고 하여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부끄러움의 뿌리를 죄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이들은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뱀의 유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 그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찾아왔습니다.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부끄러움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합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지만, ‘죄’라는 부끄러움의 뿌리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법을 어겨도 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금세 밝혀질 거짓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부끄러움을 부끄러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신앙과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을 향한 조롱에 신앙인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만을 붙잡고 있으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부끄러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고, 제물을 사고팔면서도 부끄러움을 잊고 자기 배 채우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한 신문사에서 풍자만화를 통해 세상을 꼬집는 일을 하는 김영훈 화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 들수록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유는 나이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운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의 상징인 수치의 십자가였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오히려 세상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부끄러움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부끄러운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인생이 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연륜이 늘수록 부끄러움을 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넘어 영광의 길을 걸어갑시다. 

*기도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므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쏟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도 허락하옵소서. 
주의 말씀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길잃은 저희를 진리로 인도하옵시고, 참된 소망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궁핍한 형편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치료받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멀리 떨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채워 주옵소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두려움 속에서도 맡은 일을 감당하는 의료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고, 성실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일깨워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기도 제목 : 
-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 진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달라고 
-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 날마다 부어 주시는 은혜로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게 해 달라고 
-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해 달라고 

* 주기도문으로 기도회를 마칩니다.